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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직 축하드립니다.' 20여 년만에 가정주부로의 귀환을 축하하며 어머니께 선물한 공로패. | |
ⓒ 김재훈 |
"공로패, 박금순! 귀하께서는 김창환의 부인으로, 김혜민과 김재훈의 엄마이자 백진우의 장모, 백지원의 외할머니로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의 발전을 위해 기울이신 노고와 공헌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베풀어주신 가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을 것입니다. 이에 그 뜻을 높이 받들고 깊이 간직하기 위하여 존경의 마음을 이 패에 담아 드립니다. 2015년 6월 1일, 가족일동... 여보, 고생했어!"
"뭐가 이렇게 말이 거창해~ 뭐 이런 걸 했어~"
지난 6월 6일 토요일 저녁,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20여 년 만에 가정주부로 돌아온 어머니의 퇴직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퇴직 축하 파티를 하기 이틀 전 매형의 전화 통화로 어머니가 회사를 그만두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날 통화할 때만 해도 일거리가 없어서 회사를 잠시 쉰다고 했었는데 아마 아들에게 굳이 알리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무엇을 해드려야 할까...' 매형과의 통화를 끊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말 쉴 새 없이 달려온 어머니의 인생, 무언가 기념할 만한 것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어머니의 인생을 돌아보건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할머니로 불렸을 뿐, '박금순'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살아왔던 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름을 크게 확실히 새겨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그게 좋겠다!' 그것을 얼른 만들어 드리고 싶었고, 검색을 해 제작할 수 있는 곳으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모두가 기다렸던 퇴직...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공로패'
▲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공로패에 넣을 말을 생각하니, 어머니의 지난 날이 떠올랐다. | |
ⓒ 김재훈 |
"누구 만들어주실 건가요?"
"어머니요."
"예? 어머니요?"
"네, 저희 어머니께서 이번에 20여 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셨거든요. 상패 하나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이야, 어머니 공로패 해주시는 분은 일하면서 처음이네! 나도 한 번도 해준 적 없는데! 어머니 좋아하시겠어요! 여기 무슨 말을 적을지 정해서 알려주세요."
매장 안에 진열된 수많은 상패들, 누군가를 위해서, 어떤 날을 기념하며 적힌 상패 속 글귀들을 보며 '나는 어머니에게 어떤 말을 전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머니의 지난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 30여 년 전 결혼식 사진, 무덤덤한 표정의 두 분. | |
ⓒ 김재훈 |
언젠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랑 왜 결혼했어?"
"응? 너희 아빠 잘생겨서. 코도 오똑하고."
사진을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제 부인에게 "남편하고 왜 결혼했어?"라고 묻는다면 "우리 남편 잘생겼잖아!"라는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아빠가 잘생겨서 결혼했다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하는 어머니의 모습. 제가 그 모습이 참 좋았나봅니다.
30여 년 전 결혼식에서도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알고 계셨을까요?
▲ 20여 년 전 가족 사진. 장사, 사업, 공장... 이후로 몇 번이나 직업이 바뀌었는지... | |
ⓒ 김재훈 |
회사를 다니던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가정주부로 신혼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누나와 저를 키우며 주부 대학도 다녔다고 들었는데 아버지가 일찍 회사를 나오면서 어머니의 생활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처음은 식육점이었습니다. 시장 깊숙이 위치한 '양지식육점'. 초등학교를 다녔던 누나와 제가 학교를 마치면 곧장 식육점으로 향했습니다. 식육점 안쪽 자그마한 방에서 누나와 저는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부모님이 일을 마치길 기다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팔아본 적도 없을텐데 장사를 시작했던 것, 그리고 고기를 잘라본 적도 없었을 텐데 심지어 식육점을 시작했다는 것. 어렴풋이 큰 칼을 들고 빨간 고기를 자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육체 노등으로 돈 버는 게 또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끔 저희 누나는 이야기 합니다.
"내가 이렇게 통통한 체질로 바뀐 건, 그때 엄마, 아빠가 식육점 할 때 고기를 많이 먹여서 그런 거야."
누나와 저의 건강에 일조했던 부모님의 식육점 운영은 제가 중학교를 들어갈 즈음에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고 어머니의 직업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먼 공장에서, 가까운 공장... 다시 먼 공장으로
▲ 10여 년 전 가족 사진.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식 걱정을 줄여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 | |
ⓒ 김재훈 |
'창성전자'. 식육점을 그만두시고 아버지께서 시작한 공장의 이름입니다. 이곳에서 어머니는 몇몇 아주머니들과 아버지와 함께 근무하셨고 저와 누나는 주말에 가끔 놀러 갔었습니다. 검은색 페인트가 칠해진 철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면 군청색에 알 수 없는 기계들이 몇 대 있었고 어머니는 그 앞에 앉아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반복되는 동작을 몇 시간 동안 계속 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집에서 멀었던 이 공장 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아버지는 집 앞 상가 1층에 새로 공장을 열었고 어머니는 이곳에서도 함께 일하셨습니다. 이른 새벽 일어나셔서 가족들의 아침 식사를 챙겨주고 출근, 점심 때 다시 집에 와서 가족들의 식사를,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가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집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늘 밝게 맞이해주던 어머니는 한쪽 눈을 가리고 힘들게 걸어와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왔니?"
"엄마, 눈이 왜 그래? 다쳤어?"
"응~ 일하다가 납 물이 눈에 튀어가지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머니가 하셨던 일은 자그마한 모터에 달린 구리선의 일부분을 뜨거운 납 물에 살짝 담갔다가 꺼내는 작업이었는데 그만 눈에 뜨거운 납 물이 튄 것이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맨 살에 닿아도 엄청 뜨거운데, 눈에 튀다니....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시력을 회복하셨고 그 후로도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언제나 누나와 저는 이야기했습니다.
"엄마, 일 그만하셨으면 좋겠다."
"맞아, 엄마 일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려면 누나랑 나랑 얼른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야겠지?"
그렇게 누나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함께 일을 하셨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공장은 문을 닫게 되었고 아버지는 잠깐 에어컨 관련 일을 하시다가 택시 운전대를 잡게 되셨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멀리 있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시게 되었구요. 어머니가 새롭게 들어간 공장은 참으로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토요일도, 심지어 일요일도. 평일에는 야근까지. 편히 쉬는 날이 없으셨죠. 심지어 공장이 멀어서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단 하루도 가족의 아침을 챙기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힘들고 피곤해도 아침은 먹어야 한다며 가족들의 아침을 챙겨주시고는 머리도 덜 말리신 채 공장 버스를 타야한다고 뛰어 나가셨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16층까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시간을 단축해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급히 달려가다가 넘어진 적도 있으셨죠. 이런 생활을 10여 년 넘게 해오셨습니다.
"엄마, 누나랑 나랑 이제 돈 벌잖아. 이제 일 그만둬. 쉬어도 된다니까~"
"쉬면 뭐하니~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지. 너랑 누나랑 결혼도 해야 되고, 생활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얼마나 많은데,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다녀야지. 엄마는 괜찮아. 그러니 너도 열심히 해!"
"우리 가족만 건강하면 엄마는 바라는 것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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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 가족 사진. 매형에서 조카까지, 가족이 2명이나 늘었고 행복은 몇 배나 더 커졌다. | |
ⓒ 김재훈 |
어머니는 참으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얼마 후 예쁜 조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할머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라고 불릴 때는 몰랐는데 할머니라고 불리고 난 후,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주름도 흰 머리도 언제 이렇게 늘어났는지. 가끔 어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엄마, 이제 나만 잘 되면 되니까 이제 좀 쉬어. 나 잘 할 수 있어. 걱정 하지 말고, 무리하지도 마."
"언제 장가가려고? 너 장가 갈 때까지는 일 가려고 했는데, 요즘은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좀 그래. 그만 둬야 하나, 그래도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가야지."
▲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공로패를 전해주고 나서 왠지 부끄러워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 |
ⓒ 김재훈 |
언젠가 일요일에도 출근하고 퇴근한 어머니와 함께 회와 소주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하고 싶은 일이 뭐야?"
"엄마는 바라는 것 없어. 그냥 우리 가족 건강하게 살고, 너 장가만 이제 가면 되겠다."
"에이 그런 거 말고~ 엄마가 진짜 원하는 거~ 하고 싶었던 거~ 나도 이제 돈 버니까 회사 그만두고 해보면 되잖아~"
"글쎄, 그런 거 없는데..."
그때 어머니의 대답을 들으면서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어째서 하고 싶은 것이 없을 것인가 하고요. 하지만 막상 일을 그만두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상패에 쓸 말을 생각하다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부인으로, 누나와 저의 엄마로, 그리고 할머니로 살아왔기에 어머니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제 어머니가 그 동안 힘들게 움직인 몸과 마음을 쉬시면서, 뒤도 돌아보고 앞의 일도 천천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온전히 어머니의 삶을 사실 수 있도록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죠.
박금순 여사님, 당신의 퇴직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보너스
▲ 감사함은 언제나 마음 속에... 저렇게 조카의 장난감 틈에 공로패가 있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건 중요하다. | |
ⓒ 김재훈 |
제가 선물해드린 상패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박스에 담긴 채 조카의 장난감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읽어주는 상패에 적힌 이야기를 들으며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잊히지가 않습니다. 이 글을 읽은 <오마이뉴스> 독자분들도 행복하고, 즐거운 상상을 하며 마음을 표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틀림없이 좋으실 겁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6월 13일 오마이뉴스에 등록된 기사.
*원문보기. http://omn.kr/e45s
엄마에게
상패를 줄 생각을 했던 순간도,
상패를 준 순간도,
상패를 준 후 글을 쓰는 순간도,
글을 쓰고 난 후에도, 지금도, 볼 때 마다 여전히 좋다.
글이 배치되었다는 연락이 오고,
댓글이 달리고.
네이버 오미아뉴스 페이지 메인에도 소개되고,
엄마를 축하하는, 우리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페이스북까지,
많으신 분들의 댓글과 축복의 말씀들이 전해져왔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앞으로도 많이 부족할테지만
글을 통해서 사람들과 좋은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정말 뿌듯했다.
6월의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또, 쓴 글을 보고 격하게 칭찬해주고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권해준
우리 브라덜즈와 사회적기업학 석사 과정 동기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분들을 만나서 나는 또 많이 배우고 또 많이 성장했다. 그리고 함께 해서 너무 좋다.
나도 도움을 주고 싶고, 줄 것이고, 주기 위해서 노려할 것이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