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음…, 여보세요?"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어나."
"왜? 장난치지 마. 나 졸려."
"범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뭐?"
여느 때와 같이 늦잠을 자던 지난 3일 아침, 친구의 전화 한 통을 받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꿈이었길 바랐지만, 제 휴대전화에는 새벽에 범이로부터 온 메시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라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갈게."
저는 이렇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고 바로 친구가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친구 아버지의 부고
친구 아버님께 조의를 표하고, 친구를 말 없이 안아줬습니다.
"왜 이렇게 일찍왔어?"
"내가 제일 가깝잖아. 애들 곧 올거야.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틀 전에 벌초도 같이 했는데…."
"그랬구나…."
"아무런 말씀도 없이…, 무슨 말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 2006년, 휴가 때 부모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친구들과 일병 휴가를 힘들게 맞춰서 마련한 식사 자리. 식사가 끝나고 식당 앞에서 찍은 사진. | |
ⓒ 김재훈 |
저는 범이의 아버님을 8년 전 친구들과 함께 맞춘 일병 휴가 때 처음 뵀습니다. 친구들의 부모님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였습니다. 아버지들은 아버지들끼리, 어머니들은 어머니들끼리, 저희는 저희끼리 앉아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때 기분이 너무나 좋아서 앞으로 종종 이런 자리를 만들자고 이야기했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남아있는 건 그때의 사진 한 장뿐입니다. 장례식장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이제 나이를 꽤 먹었구나. 이런 일들이 앞으로 우리에게 계속 될 텐데…. 나는 떠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고, 그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고, 그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다
▲ 할아버지와 어린 손주들 할아버지께서 손자 손녀들과 마당에서 노는 모습. 이 모습을 가족들 중 누군가가 찍어줬다. | |
ⓒ 김재훈 |
이 사진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옛날, 할아버지 곁에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사촌들 모두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보고 있습니다.
이날 무슨 날이기에 우리가 다 모였는지, 저 음료수는 할아버지가 사주셨는지, 할아버지는 우리들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셨는지, 이날 할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셨는지 궁금한 것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습니다.
▲ 할아버지와 장성한 손자들 할아버지를 찾아온 손자들과 마당에서 찍은 사진. 언제 이렇게 컸을까. | |
ⓒ 김재훈 |
지난 2009년, 할아버지 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빛바랜 사진 속,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꼬마들은 이제 성인이 됐습니다. 이날도 평소처럼 텔레비전을 켜고 밥을 먹으며 약간의 대화를 하다가 집을 나왔습니다.
이때 어디 놀러가지 말고 할아버지와 함께 방에서 옛날 사진을 보며 할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해봅니다. 이제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 할아버지는 2012년 따뜻한 봄날에 돌아가셨습니다.
쑥쓰럽겠지만 들을 수 있을 때 듣자
▲ 아들의 학창시절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렸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눈 밭에 혼자 누워 있는 사람이 나다. | |
ⓒ 김재훈 |
저는 공과대를 나왔습니다. 공과대를 졸업했지만 제 전공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입학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공학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아 고생 끝에 10년 만에 겨우 졸업했습니다. 그동안 부모님 속도 정말 많이 썩였었죠.
대학교 생활 중 가장 즐거웠던 일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기록을 남기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 누리집에 올린 사진이 8000장이 넘었으니 엄청나게 공을 들였죠. 즐겁게 그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됐을까요. 지금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일을 주로 하는 직장인이 됐습니다.
이러한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부모님과 갈등도 많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힘들게 입사했던 회사를 부모님 몰래 그만두기도 했었지요. 그 과정 속에서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시기도 했고, 설득도 하셨지만 결국 포기했습니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냐? 왜 너만 그렇게 별나게 구는 거야? 그럴려고 너 대학 보내준 줄 아니? 엄마, 아빠는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
부자간의 대화는 이것이 끝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아버지와 웃으면서 마음 편하게 대화를 해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합니다.
▲ 아버지 학창시절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 학창 시절 사진. 신기하게도 사진 속 혼자 누워있는 사람이 내 아버지다. | |
ⓒ 김재훈 |
아버지와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중 우연히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위에 있는 제 사진과 닮은 점이 있지 않나요? 사진 속 혼자 누워있던 저처럼 이 사진에도 혼자 누워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제 아버지입니다. 이 사진을 물끄러미 보면서 아버지와 제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지난 삶이 생각이 났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시다 나오셔서 식육점을 운영하시기도 하고, 또 공장을 운영하시다가 에어컨 설치 관련 일을 하시는 등 수차례 직업을 바꾸면서 저와 누나를 키우셨습니다. 지금은 개인 택시를 하고 계신 아버지.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버지의 직업뿐이며 제가 태어난 이후의 삶인데, 제가 모르고 있는 아버지 인생의 이야기는 얼마나 더 많을까요?
"아버지,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이 뭐였어요?"
"아버지, 어머니랑 연애했던 이야기해주세요."
"아버지, 저랑 누나랑 키우면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였어요?"
용기를 내서 아버지의 삶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면 우리 부자의 대화가 전처럼 끊어지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되도록이면 더 많이, 더 자주, 더 진하게
▲ 조카와 공원에서 더 크면 조카에게 이 사진을 보며 이날의 일을, 감정을 이야기해줄 것이다. | |
ⓒ 김재훈 |
곧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 다가옵니다. 여전히 쑥쓰럽지만 특별한 날이기도 하니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많이 물어보려 합니다. 좋은 질문도 미리 준비해서 부모님들이 이야기를 편하게 잘하실 수 있도록 할 예정이고요.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3대가 모이는 꿈을 이룰 수는 없지만 제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조카에게 3대가 모여 가족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행복합니다.
벌써부터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에 설렙니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을까요?
* 친구 아버님이 좋은 곳으로 가셨길 바라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9월 20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네번째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4918
기사가 실린 9월 20일, 저녁 부모님과 누나와 조카와 함께 부모님의 32번째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아버지와 소주를 한 잔, 두 잔 부딪히고 마시며 술 기운을 빌려
'아빠, 엄마 연애 이야기 해주세요!' 이렇게 물어보려 했는데, 그 말 한 마디 하는게 왜 그렇게 힘든지...
가족 사람도서관 프로그램 런칭 전, 시험 삼아 우리 가족부터 사람책 작업을 해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 부모님, 누나, 매형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부모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날 마신 소주는 유달히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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